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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임의 마주보기- 오셀로의 확증 편향과 손수건

사람들은 누구나 때때로 확신의 오류에 빠진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인 양 자신만의 “마음속 사각지대”를 알아채지 못하고, 큰 숲을 보지 않고서 판단을 잘못하거나 어처구니 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편견과 아집으로 인해서 자신의 눈에 ‘까만 안대’를 착용한 것처럼 자아 정체성과 자제력을 상실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휩쓸려 주관을 잃거나 맹목적으로 무작정 행동에 옮기고 만다. 문제는 인지적 편향에 기인한 잘못된 확증이 자아는 물론 타인에게도 불행과 고통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우리는 그동안 역사와 정치 등 인류사를 통해서 이렇게 편향적인 믿음에 빠져 오류를 범하는 경우들을 수없이 봐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영화, 연극, 소설, 드라마의 주요 테마로 되새김질 됨으로써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자세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25년 3월 어느 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Othello’(오셀로)를 관람했다. ‘오셀로’는 ‘햄릿’, ‘리어 왕’, ‘맥베스’와 함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4대 비극에 속한다. 이 연극에는 할리우드의 두 스타인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과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이 나왔다.     ‘오셀로’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하니,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베니스의 유능하고 명망 높은 흑인 장군인 오셀로(덴젤 워싱턴)와 자신이 아닌 다른 동료를 부관에 임명한 오셀로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부하 이아고(제이크 질렌할)가 펼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잠깐 연극평을 해보면, 아무리 현대식으로 꾸몄어도 전반적으로 무대 세팅과 장비도 별로 볼 게 없었고, 덴젤의 오셀로 연기는 다른 역들에 비해서 그다지 감동과 에너지 없이 싱거웠고, 자살 장면에서도 처절한 후회와 절규를 뿜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전율적인 ‘클라이맥스’를 느끼지 못했고, 그 연극에 냉랭한 기분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게다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나온다고 해서 그런지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연극을 보는 내내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도 딸과 함께 옥신각신하며 “저돌적으로, 현명하게, 모험적으로” 노력한 끝에, 아주 저렴한 가격의 표를 구입하여 매우 좋은 자리에서 관람했다. 아마도 그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온 ‘오셀로’를 비싸게 보았으면, 두고 두고 무지 속상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이 작품을 거론하는 이유는 ‘확증 편향’의 오류와 ‘지독한 질투심’의 매우 위험하고 사악한 결말 때문이다. 오셀로는 부관 자리를 놓친 이아고의 계략에 빠져, 결국 사랑하는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자신도 의분을 참지 못해서 자결하는데, 이 모든 것이 바람 피운 아내가 자신이 사랑의 증표로 선물한 소중한 “손수건”을 남친에게 주었다는 오해가 어이없는 확신으로 자리잡고, 근거 없는 의심과 질투심에 불타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아고도 상관인 오셀로가 자신보다 다른 부하를 더 신임하고 부관 자리를 준 데에 대한 사악한 시기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거짓말로 매우 나쁜 배반 행위를 저지르고, 마침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비참한 불행에 빠뜨리게 한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사리 판단을 완전히 잘못했고, 확증 편향의 철저한 오류를 범했다.   물론 ‘오셀로’의 이야기는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일의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져,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괜한 일에 화를 내고 심한 스트레스를 주며 괴롭히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내린 결정과 확신을 다시 뒤돌아보고 반추해보고 사리를 잘 따져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오셀로가 사랑하는 데스데모나와 열린 마음으로 좀 더 진지하게 대화하고, 자신의 울분, 격노와 질투의 근원을 겸허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면, 그렇게 슬프고 처참한 비극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크게 소리 내어 생각한다, “그까짓 ‘손수건’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오셀로 편향과 오셀로 연기 확증 편향 편향적인 믿음

2025-06-10

[성서로 세상 읽기] '아나크리노'<'조사하다'는 뜻의 헬라어>가 필요한 시대

데이터와 지식의 과잉은 정보화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정보의 양은 폭증하고 업데이트의 속도는 가속화한다. 정보 과잉은 정보 피로 증후군이나 정보 강박 욕구를 가져온다.     정보 홍수와 과부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적 정보 접속으로 이어져 지적 지평은 외려 축소되고 사회적 소통은 갈수록 메말라진다. 수많은 정보에 노출된 결과, 결정 장애에 시달린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미시적 소담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사회 관계망은 계속해서 확대되지만 그 깊이는 얕아진다. 정보 과잉 시대에 무수한 청맹과니, 무지렁이, 어정잡이(겉모양만 꾸미고 실속이 없는 사람)가 양산된다.     17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책이 쏟아져 나오는 양이 끔찍할 정도로 늘어나면 결국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그가 되살아나 현시대를 바라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회에 유포되는 다양한 형태의 허위정보는 정보전염병(infodemic)이 되어 혼란과 위기를 증폭하고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정보전염병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짝하여 우리의 의식과 영성을 지배하고 나아가 타인과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나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증거는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성을 이름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인 셈이다. 영국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이 1960년대 처음 정립한 심리 현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정치인, 관료, 기업인, 그리고 군중들이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과오를 저질러 왔다.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선택적 사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확증 편향이 조장되거나 확산할 경우, 사회적 증오를 넘어 집단 광기의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독일인들도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전선동에 넘어가 집단 광기에 빠져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광풍을 일으켰다.     “분노와 증오가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히틀러의 입을 자처한 희대의 프로파간다 괴벨스의 섬뜩한 말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이 이미 지닌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나아가 자기 확신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한방에 모여 떠드는 과정에서 그러한 공유 신념은 한층 공고해지고 확실해져 불변의 진리로 등극한다. 그 방에서 나와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어떤 사람은 불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분노한다.     각자가 속한 방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다.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20세기의 대표적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라고 주장한다.  균형 잡힌 신앙은 반성적 사고와 통전적 영성에 기대어 자란다. 자신이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반추 대신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증오한다.   사도행전에는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칭찬하는 내용이 나온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여기서 ‘상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크리노’인데, 그 뜻은 ‘조사하다’이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로부터 들은 복음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조사했다는 뜻이다.     자신이 서 있는 믿음의 토대를 스스로 ‘상고’하는 태도, 즉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칭찬한 것이다. 성경을 상고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곡해를 걸러내어 정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맹신이나 확증 편향은 쉽게 자기도취와 자기해체로 이어지고 맹목적, 광신적 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확증 편향을 선동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된 우리 시대의 허위 정보와 사특한 이념을 경계해야 한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 읽기 헬라어 조사 정보화 사회 확증 편향 정보 과잉

20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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